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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7-19 진안,사천,남해,구례 - liFe - 2013. 12. 2. 23:57

또한번 출장을 핑계로한 여행이다.


목요일 아침7시 잠실에서 출발해 진안에 도착하니 겨우 열시밖에 안됐다. 출근시간 피한다고 좀 일찍 나섰더니 너무 일찍 도착했다.
진안IC를 나오는데. 정면에 허여멀건 산봉우리 두개가 세로로 길쭉하게 올라있다. 이 무슨 대륙의 산도 아니고... 도로표지판을 흘깃보니 마이산이다.
도착해서야 알았는데. 강릉 처가집 한쪽벽에 붙어있는 그사진의 주인공이다. 어쩐지 무척 낯익다했다.
비스듬한 아침해를 받으며 산을 산책한다. 셔츠에 구두. 심지어 타이까지. 산에 있기에는 참 뻘쭘한 복장인데. 오랫만에 아침 산공기 상쾌하다. 기분 좋다.
같이간 친구랑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뒷짐지고 쉬엄쉬엄 이삼십분쯤.
탑사가 나타났다. 멀리서 봤던 그 봉우리 사이에 수많은 돌탑에 끼워져있는 절이다.
역시 대륙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경치이다.
봉우리는 자세히보니 흙과 돌의 거대한 반죽같은데. 어디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이상한 족보의 지형이다.
한바퀴 휙 돌고. 내려오는 길에 분위기 좋은 밥집 테라스에서 맛대가리 없는 김치찌게로 점심 해결하고.
시간 다되간다. 일하러갑시다.


4시반쯤 일이 끝났다. 사천으로 빨리 넘어가려는 우리의 속셈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럴수도있지.
부지런히 차를 몰아 사천으로. 시내를 피해 삼천포에 도착하니 6시가 좀 넘었다.
바닷가 모텔로 숙소를 잡고 옷부터 갈아입는다. 몸이. 후련하다.
숙소는 나름 오션뷰인데. 시설은 여관에 매우 가까웠다는. 구려.
그래도 오션뷰가 다음날 아침에 제대로 역할을 해줘서 나름 만족이다.

마이산에서 김치찌게는 맛도 없었는데. 양도 적었다. 가뜩이나 오후에 두시간 정도 말을 해댔더니 삼천포에 도착해서는 심하게 배가 고팠다. 사냥을 나가야지..
육해공을 놓고 아주 잠깐 고민을 했으나. 역시 우리는 바다에 온 것이고 후꾸시마따위는 오만년 전에 일어난 일인거다. 고려의 대상이 못된다.
그리하여 물고기를 잡아묵기로 했다. 횟집으로 갈까 어판장으로 갈까..? 항구에 왔으니 어판장이지.
사실 오는 길에 검색질로 어시장의 위치는 이마 파악이되 있었다. 걸어서 십분정도.
시장 한바퀴 휙 둘러보고 맘씨 좋아보이는 언니네에서 숭어 한마리 떠서 근처 횟집으로갔다. 특이하게 생긴 멍개와, 비단고기, 전어가 서비스로 올라왔다.
이 멍개는 맨날 먹던 빨간멍개보다 좀 덜 쌉쌉한데. 내입에는 그냥그냥. 비단고기는 쫄깃하니 꽤 맛있었고, 전어야 늘 맛있고, 메인인 숭어도 좋았다.
양도 둘이먹기 푸짐한 만큼이었었고. 실제로 좀 남았다.
시잘때기 없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히히덕 거리다가 진지한 척하다가.
즐거운 대화였다. 내 오래된 친구들 이외에 이렇게 편하게 관심사를 나눌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않은데. 그것도 회사에서.
소주 한병, 두병, 세병쯤 비웠나? 아줌마 퇴근한댄다. 9시 반밖에 안됐는데... 어쩔수없지. 나와서보니 그 골목에 불켜진 집이 거의 없다.
아차. 여긴 서울이 아닌거다.

술 많이 안먹는 이 친구덕에 내가 두병 이상 마신것 같은데. 가게를 나와 담배를 한대 물었더니. 몸이 휘청한다.
그래도. 곧 죽어도 2차~ 오면서 봐둔 포장마차에서 꼼장어 하나 시켜놓고 또 주저리주저리.
나올때 현금이 모잘라 캐시포인트 찾느라 쑈한것같은데... 어쨋든 그게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다음날 아침. 눈이 부셔서 잠이 깼다. 오션뷰의 위력이다. 아홉시도 안됐는데. 쩝.
씻고나서 슬쩍 톡을 날려보니 대답이 없다. 이 인간 아직 자나보다. 멀뚱히 있기도 뭐하고해서 짐싸가지고 나왔다. 차에다 던져놓고. 동네산책이나 할라고.
차는 가로등아래 세워놨더니 갈매기똥 폭탄을 맞았다. 제길. 하필 여기다 세웠냐..
숙소앞 방파제를 서성거리는데 발밑에 물고기떼가 오락가락한다. 여시 남해. 풍요롭구나.
갑자기 전투의지가 솓구친다. 오늘밤에 낚시나 할까보다..
그렇게 방파제앞에 한참 쪼그리고 앉아 고기구경하다가 이제야 기어나오는 이 인간 잡아서 아침 묵으러 간다. 복지리. 해장된다. 맛있게 묵었다.


아직 사무실 들어가려면 시간은 좀 남았고.. 라떼 한잔 들고 해안을 서성거린다.
삼천포대교 바라보며 사진 몇장 찍고. 평일 오전에 바닷가 정자에서 무려 고기까지 구워 음주를 즐기는 아저씨들의 팔자를 부러워도해보고.
남서쪽 해안을 타고 올라가면서 마찬가지로 한량같은 바다를 같은 마음으로 즐긴다.
길이 끊긴 바닷가 작은마을도 들어가봤다가. 이순신 어쩌고저쩌고하는 공원에서 잠시 바람도 쐬었다.
그렇게 설렁설렁. 어느새 저멀리 사천대교가 보이고... 사무실 가까이 왔구나.
사천시청은 사천대교 동쪽끝 황량한 벌판에 참 생뚱맞게 우뚝서있다. 그옆에 우리 사무실. 위치는 확인했고.
그래도 좀 시간이남아. 사천대교를 건넜다. 대교위에 확트인 바다가 시원하다. 건너편 공원에서 담배 몇대 피고.
쭈쭈바가 땡겨서 슈퍼 찾느라 좀 깊이 들어갔던것 같은데. 그렇게 찾은 조용한 마을.
동사무소 마당 테이블에 앉아 선선한 바람에 기분좋게 쭈쭈바와 노가리 즐겨주시고. 이제 일하러 가자.
돌아오는길에. 바다배경으로 노래하던 브로콜리가 맘을 좀 후벼팠던것같다. 

 

세시간만에 일을 마치고. 이제 같이 온 친구는 서울로.
서울행 버스표 매진이라고 터미널에서 잠시 쑈를 했는데. 다행이 대전을 경유하는 노선을 뚫어 무사히 사천을 떠났고... 이제. 혼자 남았음.
남해를 보고싶어서 난 하루더 머물기로했던거다. 이제 슬슬 남해로 들어가볼까?
가는 길에 삼천포에 다시 들러 어제 묵었던 숙소에 두고온 핸펀 빠떼리 챙기고.
어제 눈에 거슬리던 공원을 잠깐 들어갔는데. 바다에 세워논 조각상도 그렇고. 울긋불긋한 조명도 맘에 안들고.. 벤치에 앉아 숙소 검색하다 나왔다.
남해에 찜질방이 몇개 있나보다. 오늘은 거기서 자는걸로... 하려고했다.
일단 출발.

남해.
관광지라 좀 어정쩡한 시골인줄 알았더니. 여기. 완전 시골이다. 삼천포대교를 넘으면서부터 불빛이 별로 안보인다.
중간중간 마을이 하나씩있는데. 마을 시작인가 하면 끝나버린다. 어쨌건 난 검색해둔 찜질방으로.
근데 찜질방 가는길이 수상하다. 이차선 해안로를 달리다가. 중앙선이 없어지더니. 가로등도 없어졌다.
빛이라고는 우리 애마 헤드라이트와 훤한 보름달. 그런길을 가다가.. 김기사가 도착을 알렸다.
불빛 하나 없는 길 한가운데에서. 자세히보니 간판이 있기는하다. 밤에는 안하나보네... 쩝.

하는 수 없지. 다른 찜질방으로. 남해에서도 가장 남쪽끝. 상주해변까지.
남해는 생각보다 컸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려서 상주해변의 찜질방 도착.
근데. 또. 문닫았다... 분명 구글은 24시간이라고했는데. 하긴. 사람이 있어야 영업을하지.
어쨌건 이때부터 약 30분간 맨붕. 이쯤되면 이동네 과연 영업을하는 숙소가 있을까싶다.
팬션은 좀 보이긴 하는데. 혼자와서 펜션질은 너무 소모적이기도하고 너무 쓸쓸하기도할 것같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전화했더니 역시 방 없댄다.
대책없이 온 내가 죄지. 검색 포기.
해변 주차장에 차세우고 무작정 그동네를 돌아다니다. 영업중인 여관하나 발견. 결국은 여기가 오늘 나의 누울자리이다.

잠깐 붕괴되었던 멘탈 재구축을위해. 가방던지고 산책나왔다.
역시 사람 한마리 보이지않는 백사장을 한참 걸었다. 오늘밤은 달이 참 멋있게 떴다. 바람도 파도도 잔잔하고.
사람을 피해 외진곳을 다니는데. 너무없으니. 오늘은. 외롭다. 무척. 우울한거다. 무척. 몇군데 전화해서 잠깐 수다 좀 떨었는데 별 도움은 안된다.
여관앞 슈퍼에서 맥주 한캔 사들고 숙소로. 티비 좀 보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눈뜨니 열시가 좀 넘었다.
대충 아침 해결하려고 숙소앞 백반집에 들어가 된장찌게 하나 시켜놓고. 오늘 뭘해야할지를 생각한다.
사실 어디를 가야할지 뭘 해야할지 정해놓은게 하나도 없었다. 이쪽 동네 아는바도 없고 찾아볼 시간도 없었다. 대책없는거지.
마침 식당 한쪽벽에 남해 관광지도가 붙었다. 섬지도 빽빽히 사진과 그림이 실렸다.
그렇게 눈으로 지도를 쫓으며 보리암과 조랭이마을을 찾아냈다. 이렇게 들러서 이렇게 돌아 하동쪽으로 빠져나가면 되겠다... 속으로 경로를 그리며.
식사는 해물된장. 기대보다 맛이 좋았다. 좀 특이한 맛이었는데. 어쨌건 든든하게 천천히 많이 먹었다.

상주해변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리암 간판이 보인다. 금산 등산로란다.
김기사는 아직 8KM더 가라는데... 차를 세우고 주차안내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이쪽은 등산로고. 저쪽은 마을버스타고 올라간댄다.
왕복 세시간. 잘 됐다. 산도 좀 타고싶었는데. 그리고 까오가 있지. 마을버스가 뭐니..라는 생각으로.
트렁크를 뒤져 몇달간 짱박혀있던 지팡이를 찾고, 등산화를 고쳐 매고. 출발.

남해가 관광지라지만 어지간히 외진가보다. 가을 이 시기에 토요일인데. 산이 한적하다.
가을산. 그리고 오랫만에 찾은 산. 나름의 정취를 즐기며. 정확히 한시간 반을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아. 보리암. 금산 정상 절벽위에 얹힌 작은 암자.
시야가 확 트인다. 켭켭이 줄지어 내려간는 산등성이. 그 줄기를 따라 저 아래 어제밤 헛헛한 마음에 서성이던 상주해변이 조그맣게 보이고.
그너머 펼쳐진 희뿌연 남해 바다. 그리고 그위에 툭툭 던져진 섬들.
아랫쪽 절간 난간 끝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이 풍경을 바라본다.
이 엄청난 공간감에 내 눈이 혼란스러워한다. 늘 가까운 것, 작은 것만 보는 것에 익숙해져있다가 이 끝없는 심도를 어떻게 소화해야할 지 모르는거다.
넓게 트인 곳에 서면 늘 느끼는 당혹감이다.
이런 곳에서는 카메라가 무용지물이다. 자주 실수했던게. 찍었드지 이 장소를 소유했다고 그러니 만족스럽다고. 그러니 이제 돌아가자고...
하지만 손에 쥐게 되는건. 이 광활함은 온데간데 없는.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달력사진 같은 흔한 풍경사진 따위에 불과한 얕은 이미지 몇장.. 이었던 것같다.
내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으리라. 깊이 깊이 숨을 내쉬며 오랫동안 그 난간에 걸터앉아 눈의 혼돈을 즐겼다.
그리고. 그래도 포기할 수없는 소유욕에. 사진도 몇장 찍었고..^^

이런 것들을 발아래 내려두고 이 절은 조용히 앉아 있는거다.
총천연색 등산복으로 무장한 아줌마,아저씨들이 저급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디 앉아 밥상 펼칠데 없나 두리번거리고
삐딱구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허여멀건 여자들이 청바지입은 남자들에게 끌려 귀찮은 표정으로 절간 구석을 기웃거리는.
이 모진 하루하루를 견디며 이 녀석은 조용히 앉아 저 바다를 내려다보며 무표정으로 일관하는거다.
그래도 간절한 자세로 불공드리는 아줌마들 몇몇은 그 표정이 너무 선량해서 좀 뭉클하기도 했는데. 수능이 얼마 안남아서 그런가?

보리암을 지나 십분쯤. 금산 정상까지 찍고. 왔던 길로 산을 내려왔다.
높지는 않은데. 오랫만에 밟는 이 무지막지한 비포장에 체력이 좀 달린다.
그냥가기 허전해서. 산 입구 슈퍼에 들러 삶은 계란 세개, 맥주 한캔. 소나무아래 평상에 드러누워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나니 시간이 벌써 세시. 해떨어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이제 해안가를 따라 차를 몬다.
귄순관, 메이트, 구와숫자들, 브로콜리가 돌아가며 노래를 하다가 좀 지겨울때쯤 플라시보도 등장했다가 메이져레이져가 쿵짝거리기도 했다가.
그렇게 중앙선도 없는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구비구비 돌고 또 돈다.
왼쪽으로 따라오는 바다 풍경이 너무 좋아서. 중간중간 차를세우고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가...를 반복한다.
그러고보니 올 여름 꼭 이러면서 달렸던 지중해도 생각이 나고.

조랭이마을은 바닷가 계단식 논이 특이해서 관광지가 되었댄다. 이 논을 조랭이라고 하더라마는.
고 쪼끄만 마을에 사람이 꽤많다. 그래서 그런지 차세우는데도 좀 애를 먹었고.
마을은 아기자기한 어촌. 딱 맘에 드는데. 관광객들이 자꾸 거슬린다. 나도 관광객이긴 마찬가지긴 하지만서도.
휙하니 한바퀴 둘러보고. 저 아래 바닷가 바위쪽까지 길이 나있길래 거기까지 내려가 바위에 앉아 낚시 구경하면서 한참 멍때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차를 몰아 해안을 달리는데 슬슬 해가 떨어진다.
만나는 곳마다 남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내 남은 시간은 이제 곧 끝나는 거다.
어제 이 섬에 들어오면서 알았듯이. 해지고 어두워지면. 여기에선 볼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게 없다.
그렇게 마지막 넘어가는 해를 어느 도로변에 걸터 앚아 아쉽게 아쉽게 보내줬다. 가지말고 조금만 더 보여줘. 조금만 더...를 속으로 외치며.
넘어간 해의 어스름한 기운 끝까지를 찌질하게 잡고있다가. 냉혹한 어둠에 서운해하며. 남해대교를 타고 섬을 빠져나온다.

밥때도 됐고. 너무 아쉽기도하고. 그래서 생각해낸게 구례의 그 선지내장탕 집. 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니까.
하동에서 섬진강따라 구례까지. 올 봄에 걸었던 그길을 지나 9시쯤 도착했다.
장사 끝내려는 쥔아저씨한테 사정해서 밥 한그릇 얻어먹고... 아. 이맛이 또 생각나면 우짜나.. 이런 생각 하면서.
그리고 그집 앞 그 벤치에 또한번 드러누워. 이게 또 마지막 여정이 되는구나. 하면서 담배 두대.

구례를 빠져나오면서 목청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아듀~ 아듀~ 아듀~... 또 못올 것도 아닌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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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광주교육을 마치고 바로 구례로 넘어왔다.

가고싶던 지리산인데. 근처에 왔겠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겠다, 연휴겠다.. 잘 맞아떨어진다.

그간 종용이 꼬시고있었는데. 갑자기 업무 집중모드가 되면서 시간내기 곤란하단다. 뭐. 혼자가면 되지. 

혼자서 종주코스는 좀 겁나고. 산장 예약도 안해놨고. 그래서 둘레길로 코스를 잡는다. 

구례에서 하동 대축마을까지. 이박삼일 40km쯤 되는 코스다. 토요일 오후에 떨어지겠다.


광주 업무는 수요일에 끝나는거여서 목요일은 휴가를 써야겠다 싶었는데. 울 차장님. 쿨하게 출장처리하란다. 

낼은 초파일이고 담날은 토욜이니 이번주 근무는 끝났다.

광주를 끝으로 이번 교육도 모두 마쳤고. 홀가분하게 한시간반 흥얼거리며 구례에 도착. 

저녁은 광주에서 먹고 출발했고. 여관방 하나 잡아 조금 쓸쓸함을 맥주캔으로 달래며. 푹. 잤다.


담날 아침 숙소 앞에서 최강 스테미너 음식집을 찾았다. 선지내장탕. 이런. 선지에다 내장이라니.

오늘 힘들테니...라는 생각으로 먹어둔다. 푸짐하다. 아침치고는 졸 헤비하다. 

근처 김밥천국에 들러 김밥 두줄 사고. 편의점 들러 물한통과 자유시간 네개사고. 이제 출발.

지리산둘레길 구례안내센터에서 출발한다. 

지도 한장 구하고. 설명이 친절하시다. 오늘은 어까지가서 어서자고, 내일은 또 어떻게 가다가 밥은 어서 먹고 잠은 어서자고... 구구절절 설명이 참 자세하다. 아얘 둘레길 전체 숙박 리스트를 꺼내주신다. 연락처부터 금액까지 한장에 표로 정리가 잘되어있다. 폰으로 사진 찍어가란다... 찍었다. 그리고 나중에 참 요긴하게 썼다.


이제 진짜 출발.

섬진강. 뚝방길에 올랐다. 옅은 구름이 있는데. 볕은 세다. 그래도 바람이 좀 불어주니 꽤 괜찮은 날씨다. 

강위로 새가 날고 너머에 높은 산이 벽처럼 서있다. 이런걸 찾아서 온거다. 기분 매우 좋다.

조금 가다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다리로 강을 건너고 직진하면 계속 뚝방길이다. 좀전에 본 이정표는 직진이었다. 당연히 직진한다.


수난의 시작이다.


한시간쯤 걸었는데 계속 뚝방이다. 이상한데. 

아저씨가 오미마을 가서 점심 먹으라켄는데. 점심때 되가는데 마을은 안보이고. 그러고있는데. 이상하다. 걷는길이 없어지고 이제부터는 차길이다. 

네이버지도 열어본다.

아. 쓰레빠. 아까 갈림길에서 다리 건넜어야되는거였네. 아. 쓰레빠.


온길이 아까워 돌아가지는 못하겠고. 강을 건너야 코스로 올라가는데. 다음 다리 있겠지. 일단 계속 걷는다.

오면서 계속 강건너에 신경이 간다. 저쪽에서 걷고 있어야 되는데. 뭐 그래도 방향은 같으니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걸었다. 

한산한 지방도로도 나름 매력있다. 가로수 적당히 있어주어 해도 피할만하고, 아기자기한 마을 몇개 지나가며 감탄도하고. 섬진강변 좋구나.. 이러면서.

그렇게 다음 다리를 찾아 건너는데까지 찻길로 거의 10km.


어쨋든 건넜다. 방향도 코스방향과 같으니 둘레길로 올라가기만하면 된다. 

점심먹으라고했던 오미마을은 강건너에서 진작에 지나왔다. 점심이야 김밥두줄 있으니 것도 괜찮다. 

바로 앞에 슈퍼가 있길래 들어갔다. 할머니 식사하고계신다. 넙죽 인사하고 물한통, 설래임하나 집었다. 

땡볕에 거의 두시간반을 걸으면서 물은 바닥나고 입이 바짝바짝 타고있어던거다. 

할머니. 여기서 둘레길 올라갈라면 얼로가요?

할머니는 표정도 없고 대답도 없다. 둘레길이 머냐는 표정이다. 그냥 또 넙죽 인사하고나와서 바로옆 버스 정류장에 앉아 설레임 흡입에 들어갔다.

달달한 수분이 타는 모가지로 넘어간다. 아. 맛있다. 이게 이렇게 맛있었나.. 앞으로 아이스크림은 설레임만 먹을것같다.

손으로 꾹꾹눌러 녹여가면서 그야말로 흡입했다. 오분도 안걸린거같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다시며. 옆에있는 식당에 들어간다. 사실 상가라고는 그 두개 밖에 안보인다. 

여기서 둘레길로 올라갈라면 얼로가요?

테이블 닦던 아줌마가 나온다. 아줌마 같긴한데. 나보다는 좀 어려보이고. 알바인가? 

어쨋든. 여기서는 올라가는길 없고 거꾸로 좀 가야한단다. 썅. 거꾸로라니.

또 넙죽 인사하고. 가게 앞에서 네이버지도와 안내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같이 펼쳐 길을 찾는다. 거꾸로 30분 정도는 가야할 것 같다... 걷지뭐. 쩝.

다시 찻길을 따라 오분정도 터벅터벅 걷는데. 바로 앞에 차가 한대 서더니 날 부른다. 좀전에 본 식당 아줌마다. 

구례에 볼일있어 가는길인데 태워주겠단다. 아...감사합니다. 하고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를땐 정말 감사했다. 정말로. 자동차의 속도감에 새삼 감탄하며.


근데 좀 많이간다. 이쯤 서야되는 것 같은데. 계속간다. 이 아줌마 날 앉혀놓고 수다떠느라고 말할 틈도 안준다.

그렇게 한참 가더니 어느 마을 앞에 세워준다. 저 마을로 들어가면 둘레길 보인댄다. 아... 근데 너무 왔잖아.

그래도 그 친절함에 완전 감사모드로 깊은 인사드리고 차를 내렸다.

마을로 들어갔더니 둘레길 이정표가 보이긴 한다. 출발한지 세시간만에 이제서야 코스로 올라온거다. 출발점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오미마을까지 다시 한시간 정도 갔다. 

마을 넘어가면서 또 쑈를 한다. 표지판 따라가다가 산으로 들어갔는데 길이 또 끊긴거다.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다싶어서.. 그냥 넘어간다. 길도 없는 산. 

내가 가는 곳이 길이라는 생각으로 어찌어찌 넘어간다.

그렇게 오미마을에 도착한거다. 길도없는 산 넘어오느라고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시간은 벌써 세시. 송정마을까지 가야하는데 갈길은 아직 10km 정도 남았다.

사실 정상적으로 왔으면 송정 도착해서 기촌까지 8km 정도 더 걸을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삽질하느라 체력을 많이 날렸다. 송정까지만 가자.


산넘어오면서 또 물이 거덜났다. 오미에서 슈퍼부터 찾는다. 이번에는 물 두통, 캔디바 하나. 

슈퍼앞 평상에 늘어져서 또 캔디바 흡입한다. 

오늘의 굳은 결심을 번복한다. 앞으로 아이스크림은 캔디바와 설레임만 먹을 것같다.

그런데 슈퍼 앞 풍경이 심상치 않다. 먼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강을지나 너른 들판을 넘어 내 얼굴을 때린다. 

여기 주인아줌마는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서 가게문을 열겠구나.. 부러운거다.



그러고보니. 아. 맞다 숙소. 안내센터에서 찍어왔던 숙박업소 리스트를 열어 맨위의 게스트하우스에 전화한다. 

기촌마을 쪽 숙소라 내가 도착할 송정에서 거리는 좀 되는데... 픽업 한댄다. 도미토리방 침대하나 빌렸다.

잘 쉬었다. 이제 또 걷자. 


이제 마을 길을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시멘트 포장된 오솔길이다. 

그길을 따라 재를 두세개 넘어간다. 완만한 길은 좀 빨리, 가파른 길은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며 체력을 아낀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사람은 한마리도 없다. 하루종일 둘레길 반대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 딱 세명 만났다. 같이 걷고있는 아줌마들이다.

노래도 흥얼거리고 혼잣말도 중얼거리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걷는다. 

푸르름이 지나쳐 녹음이되어가는 숲길에 들리는 거라고는 바람에 쓸리는 나무와 새소리. 그리고 내 발자국소리 뿐이다. 

이 조용한 소리들이 아까워 이어폰따위는 진작에 배낭에 넣어버렸다.

어느 재를 넘어가며 꼭데기에 앉아 신발끈을 풀었다. 

눈아래 섬진강이 굽고 굽으며 산 사이로 흘러간다. 사진도 찍고. 자유시간 하나 까먹고. 하얀 담배연기도 좀 뿌려주고.

잠시 친구들과 카톡을 날리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다섯시반. 가야할 길은 4km. 이제 좀 서둘러야겠다. 

지금 페이스라면 한시간반? 도착할 시간을 대충 어림짐작하며. 좀 타이트 한데.. 낮이 많이 길어졌으니 괜찮겠지.



그런데 이제부터 산길이다. 오르막이 가파르다. 걸음이 느려진다. 

벌써 20km 이상을 걸어와 다리가 많이 풀렸고, 무릎에서 열도 나는 것 같다. 옷은 땀으로 젖었는데.. 물통은 비어간다.

그러다 중간에 계곡을 하나 만났다. 이게 오아시스 만나는 기분인가보다. 가방 패대기치고 머리부터 담근다.

땀으로 젖었던 머리를 얼음장 같은 계곡물로 적신다. 등목같은 세수를 하고.


시간이 없다. 계속 가자.

근데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숨은 넘어갈 것 같고, 쉬는 간격은 점점 짧아지는데.. 해는 넘어간다. 난감하다.

중간 어디쯤 또 앉아 남아있던 김밥으로 힘을 내본다. 하지만 뭐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간다고 풀린 다리가 회복되는것도 아니고. 힘든건 매한가지다. 

이제는 물도 떨어졌고. 아직 어둡지는 않지만 해는 벌써 넘어갔다. 산은 끝날 생각을 안하고.

아까부터 후회되는게 하나있다. 카메라. 바디에 렌즈 두개. 이것때매 배낭이 묵직하다. 렌즈 하나는 망원이라 더 무겁다. 

아. 쓰레빠. 핸폰카메라도 좋은데. 망원이라도 놓고올껄.


이쯤되니 지리산 곰 얘기도 생각난다. 멧돼지도. 오는길에 사람 똥 굵기 만한 똥을 몇번 봤는데. 들짐승이 있긴한가보다. 

주변에서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신경쓰이고. 낮에 그렇게 정겹던 새소리도 이제 열라 음산하다.

게다가 확신하건데. 이 산에 사람이라고 할만한건 나 혼자다. 벌써 대여섯시간째 사람구경을 못했다. 자꾸 섬짓한거다.

죽을동 살동 걷는다. 지팡이하나를 두손으로 쥐고 가파른 산을 기는 자세로 오른다. 마음은 급한데 여전히 속도는 나지 않는다.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고 한참 지나서. 자동차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그리고는 도로가 나왔다. 

송정마을이다. 시간은 7시반. 내가 산에서 나오길 기다렸다는듯이 마을은 금새 어두워졌다.


산에서 물이 떨어지고나서부터 막걸리가 생각났다. 쓰원한 막걸리. 갈증이 탔는데 막걸리 생각하면서 벼텼다. 

마을에 내려오자마자 밥집부터 찾았다. 그런데 밥집은 고사하고 집이 몇채 없다. 여기도 조그만 산중 마을이라 상가라는게 없나보다.

숙소에 전화해서 여기까지 픽업오라고 하면되긴한데. 들어갔다 나오면 막걸리 간절한 이 갈증이 없어질 것 같다. 

강변 큰길로 내려가면 식당 한둘은 있겠지.. 느릿느릿 도로 따라서 또 삼십분 걸어내려온다.

큰길가에 식당이 세개. 다 문 닫았다. 좌절. 하는 수 없다. 숙소에 전화해 아줌마 불렀다. 

강가 평상에 뒤집어져 담배한대 피는 사이에 차가 도착했고. 차로 10분 정도 달려 숙소 도착.

"숨게스트하우스". 이름 특이하네. 살짝 언덕 위에 강을 내려보고있는 건물이다. 

픽업나온 아줌마가 낮에 통화했던 사장님인데. 늦게까지 전화 없길래 다른집 간 줄 알았댄다. 

숙소에 도착해서. 물한모금 안마시고. 가방만 던져놓고는 바로 나왔다. 



사장님. 여기 밥집 어딧어요? 왔던길로 10분정도 걸어가랜다. 또 터덜터덜 걸었다.

기촌마을. 입구에 불이 번쩍거리는 집이 좀 있는데 자세히보니 다 펜션이다. 

이제 겨우 8시인데 식당은 다 문 닫았고 달랑 횟집하나 찾았다. 들어갔더니 중딩스러운 꼬맹이 하나가 나온다. 왠지 영업할 분위기 아니다.

식사 되요? 어른들 어디 가셨는데 언제올지 모른단다. 뭐지 이거? 나와서 다시보니 역시 간판엔 불은 켜있다. 뭐지 이거? 

마을 다시 둘러봤는데 밥집 없다. 괴롭다. 차로 10분정도 가면 화개란다. 장터가면 식당있댄다. 

더는 걸을 수 없어서 택시찬스를 쓰기로 했다. 근데 택시는 고사하고 다니는 차가 많지않다. 진짜 괴롭다. 

그와중에 동네 청년하나가 길넘어에서 나타나 도로로 들어오더니 중앙분리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내옆에와서 줄넘기를 한다. 

핸드폰 음악소리에 맞춰 줄을 넘는거다. 아.. 진짜. 뭐지 이거?

난 옆에 멀뚱히 서서 줄넘는거 보다가 차오는쪽으로 보다가. 그렇게 또 10분 정도. 난감하다.

잘못하면 슈퍼에서 라면사다가 숙소에서 끓여먹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식당 열어두고 어디간 어른들이 돌아오지 않았을까싶어서 길을 건너 중딩을 다시 찾아간다. 

어른들 안왔어요? 그럼 전화해서 영업하실껀지 함 물어봐 줄래요? 이녀석 쭈삣거리더니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금새 아줌마가 나타났다. 

밥 좀 주세요. 여기 횟집이라 식사라고 할만한게 없댄다.

흘깃 냉장고를 봤는데. 막걸리다. 이쯤되면 완전 비굴모드다. 암꺼라도 괜찮으니까 밥좀 주세요ㅠㅠ.

먹을라고 끓여놓은 된장국있는데 괜찮냔다. 오우... 졸라 땡큐. 


그렇게 기나긴 시련과 기다림 끝에 시원한 막걸리는 나에게 수줍게 다가왔다. 

사발에 찰랑 거리도록 한잔 가득따라. 완샷. 

과장없이 정확하게 말하건데... 내인생 최고의 한잔이다.

널위해 난 36년을 살아, 오늘 25km를 걸었고, 4시간 동안 수분섭취를 참았던거다.


진심으로. 고마운. 맛이다.


둘째잔은 투샷. 셋째잔은 쓰리샷. 막걸리 한병의 정확한 용량은 국사발로 3잔이라는 새로운 깨달음도 주시는구나. 

아쉽긴했는데 더 마시면 이 신성한 감동이 줄어들 것 같아 술은 그만. 저녁마다 마시던 맥주캔도 이날은 먹지 않았다. 

식사는 천천히 오래했다. 먹던 된장국이 미안한지 계란후라이 두개도 반찬으로 올라왔다. 어쨌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땀내나는 옷 벗고, 샤워하고, 주방에서 커피한잔 타다가 건물앞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 

여기도 외진 동네라. 어둠이 깊다. 바로 앞이 섬진강일텐데 희미하게 산 능선만 보인다.

또 기분좋은 바람이 분다. 뭉친다리를 펼쳐 셀프마사지. 마눌과 전화한통. 건희와 전화한통. 

커피도 맛있고 바람도 맛있다.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는 매우 기분좋은 밤이다.


다음날 아침. 눈뜨니 8시. 좀 일찍 일어나 물안개 내린 섬진강의 비경을 보자 했는데. 역시 무리다.

방은 이층침대 세개 놓인 6인실이었는데. 나 혼자 잤으니 독방인셈이다. 그래서 편하게 잤다. 시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커피랑 토스트 구워다가 로비의 넓은 마루에 앉아 지도를 보며 오늘 경로를 연구하고 있는데 사장 아줌마가 오셨다.

여행객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게스트하우스 주인답게 털털하고 입담도 좋다. 훈훈함도 있고. 

사람과 대화하는게 삼일만이라 그런지 반갑다. 잠깐 수다 좀 떤다.


숙소에서 하동쪽으로 도로따라 20분정도 걸으니. 화개장터. 토스트로 버텨야할 오늘이 걱정되어. 밥을 먹기로했다.

장터는 작고 보잘것 없다. 휘리릭 둘러보고. 딱봐도 여행객들이나 들를만한 식당 몇개중에 하나를 찾아들어간다. 

제첩국이요.

시원하고, 맛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스테미너가 필요한데. 소머리국밥을 먹을걸.



오늘은 원부춘에서 대축마을까지 9km만 걸을란다. 송정에서 원부춘까지 하루 코스 정도를 생략하는거다.

지금 다리 꼬라지 봐서는 오늘 일정도 끝까지 갈랑가 모르겠다.

어제의 삽질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이동경로를 꼼꼼히 봐둔다.

처음 2km정도 산을 오르면 그뒤로는 완만하게 내려오는 길이다. 코스가 좀 만만해 보인다.

화개장터에서 원부춘까지 버스가 있는데. 하루 한대란다. 앞으로 네시간반 남았다. 

이번엔 진짜 택시찬스다. 강변도로를 달려 산길을 한참 올라가더니 마을회관앞에 선다. 

얼마요? 팔천원. 더럽게 비싸네. 오지 프리미엄인가보다. 말은 못하고 그냥 또 넙죽 인사하고 내렸다.


마을회관앞에 익숙한 이정표가 보인다. 대축마을 8.7km. 오늘 목적지다. 이정표따라 또 걷는다.

한산한 산골마을 지나자 바로 산길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 이 산에는 인기척이 좀 있을라나. 

결론적으로. 어제보다는 좀 나았다. 그래도 여섯시간동안 한 열명정도는 만났으니까네. 

다리가 열라 쑤셨는데. 걸어보니 또 걸을만하다. 오늘은 천천히 주변 좀 보며 쉬엄쉬엄 다녀야겠다. 

지금 오전 11시니까. 아무리 퍼지더라도 또 산에서 해지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가파른 길은 힘있을 때 부지런히 걸어놔야겠다싶어 열심히 올라간다.


지도를 보니 가는 길에 절이 하나 있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초파일이고. 잘하면 절밥 한그릇 얻어먹을수도 있겠다...싶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절이 아니다. 

벽에 동자승 그림만 지우면 그냥 가정집니다. 여기 스님은 큰절 행사에 지원나갔나? 사람소리하나 안들린다. 괜히 입맛다시며 지나간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에 근사한 선녀탕이 여러개 등장한다. 사람도 없는데 옷벗고 좀 담그다갈까...하다가 그냥 패스.

움막도 하나 만났다. 나무 설기설기 붙여서 지은 집인데. 창고인가? 한시간정도 걸어올라왔으니 마을에서는 한참 떨어진곳 인데.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있다. 먼지 잔뜩낀 오래된 이불도 있고. 나름 조그만 방도 있고, 거실도 있다.

누가 여기서 왜 살다가 왜 나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외진곳에서 저 계곡을 내려다보며 혼자 참 외로웠겠다.

잘 내려가셨소.



그렇게 산꼭데기까지 두시간정도.

꼭데기를 넘어 내려오던 길이 넓은 바위를 지나간다. 바위끝을 보니 절벽이고. 그 아래로 넓은 평원을 너머 섬진강이 또 구비구비 흐른다.

절벽구석에 조그만 나무그늘. 한명 드러눕기 딱 좋아보인다. 날 위한 자리다. 아얘 양말까지 벗고 배낭비고 누웠다. 

근처에 활공장이 있다더니 멀리 머리위로 사람 대롱대롱 달린 글라이더 몇마리가 날아다닌다. 이 절경을 보며 태워대는 담배맛이 끝내준다.

 내친김에 마눌한테 탱고날려서 자랑질도 하고. 

그렇게 한참 늘어지게 쉬고나서는 이제 또 출발.




이제 계속 내리막인데 다리가 풀린다.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서 산아래 마을까지 내려왔다.

입석마을. 안그래도 어제부터 매실나무를 많이 보기는 했는데 이 마을에도 매실과수원이 널렸다. 

자식같이 소중하게 키운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붙었다. 그래도 괜찮아보이는 놈으로 하나 따서 물어본다. 낙과라고 생각하소. 시큼한데 향긋하다. 마른입에 침이 돈다.

여기는 그간 지나왔던 마을보다 그나마 집이 좀 많다.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양이 딱 조촐한 시골마을이다.

또 설레임이 생각나길래 지나가던 아저씨한테 슈퍼를 물었더니 그런거 없댄다. 아쉽다. 마을을 나오니 입구에 그럴싸한 주막도 하나있다.



둘레길은 마을을 벗어나 개울 뚝방을 타고 넓은 들판을 가로지른다.

저 위에서 봤던 그 평원이다. 이정표는 이제 2km정도 남았다고하는데 왼쪽다리가 잘 안움직인다. 그래도 뭐 평지 고작 2km니까.

절룩거리며 땡볕이 내리쬐는 뚝방을 걷는다.

발바닥도 한쪽구석이 자꾸 아픈게 이상하다. 나중에 보니까 물집이다. 양발에 하나씩. 군대 행군 이후로 발바닥 물집은 첨이다.

들판은 온통 사람키만한 보리밭이다. 어떤 밭은 아직 파릇파릇하고, 어떤 밭은 벌써 누렇게 익었다.

그렇게 보리구경하며 한참 걷다가 뒤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길이 보인다.

저기 저위에 능선을 넘어서 이제는 점같은 저 절벽에 누웠다가 산밑 저 작은 마을을 지나 여기까지 왔구나.

그뒤로는 한참 더 높은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산은 푸르고, 하늘은 더 푸르고, 양털구름은 사선으로 패턴을 그리며 그 위에 대충 걸렸다.

무의식적으로 혼자걷는 다리와 볕에 익어 따끔거리는 모가지, 나꾸 잡아 끌어내리는 배낭의 무게감 까지. 

이 모든걸 보고 느끼며 알았다. 


아... 그리워질게 또 하나 생겼구나.


그렇게 걸어 대축마을에 도착했다. 

그간 따라오던 이정표는 이제 다음 마을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바뀌었다. 무심한놈. 애썼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시간은 네시반. 그러고보니 깜빡하고있던게 생각났다. 오늘 어디서 자지? 

마을입구에 민박 전화번호가 하나 보이길래 걸어봤더니 안한댄다. 더 찾아봐야하나?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목이나 좀 축이자.

마을 안쪽에 슈퍼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가 문 안쪽에 앉았다가 내가 들어가니 멀뚱하게 보신다. 설래임 하나 집어들고 계산하는데 버스 시간표가 보인다. 

여기서 타면 하동시내 가요? 30분에 한대씩 버스가 있는데 5시, 그 다음껀 5시반. 

생각해보니 여기서 숙소잡기 쉽지 않겠다. 연휴 첫날이라 어지간한데는 다 차있을것 같기도하고. 게다가 혼자잘껀데 민박이건 펜션이건 금전압박도 좀 있고. 

시내나가는 버스표를 한장 끊었다. 15분정도 걸린댄다.


슈퍼옆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비스듬히 걸터앉아 또 설래임 흡입한다. 또 졸라 맛있다. 

그간의 고통이 온전히 내꺼였으니까 이런 기쁨도 온전히 내꺼인가보다. 

양말을 벗어 발도 좀 쉬어준다. 

슈퍼 할배는 지나가던 마을사람이랑 뭔 얘기를 주고받더니 가게 문 잠그고 나가버린다. 좀 늦었으면 이 설레임 못먹을 뻔했다.

정자기둥에 등을 기대고 바람을 즐겼다. 

이 기분이 아쉬워 버스 한대 보내고 삼십분을 더 얻었다.

그러고도 떠날라니 아쉽지만. 이제 하동으로.


하동 시내는 어설프다. 도시처럼 정돈되어있지도않고, 그렇다고 너저분함이 푸근한 읍내 분위기도 아니다. 

이것저것들이 그냥 마구 놓여있다. 서울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간판들이 천박스럽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난감해졌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다리는 잘 움직이지 않는데 어디 앉아 쉴만한데도 없다. 

좀전까지만해도 아무데서나 신발 벗으면. 강바람 불어오는 산배경의 근사한 휴식처였는데. 

갑자기 매우 우울해졌다. 울컥할정도로.

터미널 옆 오래된 콩국수집에서 국수한그릇 비우고 창밖을 보고 앉았는데. 울컥함이 가시지않는다. 


클라이막스는 끝난거야. 

대축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빨던 설레임이나 정자아래 불어주던 바람이 끝이었던거야. 

그리고는 갑자기 끝난 클라이막스처럼. 기분도 갑자기 추락했다. 

여길 오는게 아니었는데.. 제길. 어떻게든 방을 구해 대축마을에 남아있어야했는데.


배낭때문에 발이 더 무거웠다. 어디든 짐을 내려야했다. 

눈에 보이는 여관에 들러 방을 잡았는데. 천정에 거의 닿은 조그만 창문하나 달린 골방이다. 멈칫했는데. 우선 계산을 하고 짐만 놓고 바로 나왔다. 

느릿느릿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있을만한 데가 없다. 시간은 7시도 안됐는데 그 골방에 들어갈수도 없다. 

그러다 뜨레주르가 보이길래 들어가 냉커피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았다.


뜨레주르에서도 또 이 글을 쓰고있었다. 사실 여행중에 심심해질때마다 이걸 계속 써왔었다.

혼자일수록 잘 기록해놓지 않으면 이 경험들 부실한 기억과 함께 금방 날라가 버릴꺼다.

커피 홀짝거리며 핸드폰 자판을 두들기고있었는데... 갑자기 구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밤 이곳에서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확신인거다. 

하동터미널에 내리면서 사진 찍어뒀던 시간표를 보니 7시반에 차가있다. 10분 남았다.

바로 여관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나와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앉았는데. 갑자기 참았던 울컥함이 터진다.

아.. 쪽팔려. 머지 이거? 뭐가 왜 터진거지? 

생각해보니 혼자다녀서 그런가보다. 강도있는 감상들이 공유되어 풀어지지 못하고 쌓였다가 터지나보다. 어쨌든. 찌질하다.

뭐. 터진건 터진대로 놔뒀다. 통로 너머 옆자리에 외국인 둘이 앚았는데. 보일까봐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해떨어지는 섬진강변을 달리는 차안에서 소리없는 눈물이 한참 흘렀다.


얼굴을 추스리고 어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도 해본다. 

아줌마가 오늘 예약 만땅이라고했었는데 혹시나 취소된 도미토리라도 하나 없을까 싶었다. 

역시. 없다.


그간 주구장창 걸어갔던 그길을 버스는 40분만에 주파했다. 

밖으로 이젠 익숙해진 풍경들이 지나간다. 강은 항상 오른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왼쪽편에서 흐른다.

구례 터미널에 내려 느릿느릿 걸어 내차를 세워둔 강변에 도착. 

강바람이 분다. 그래 하동시내에는 이것도 없었어. 강바람.


차에 배낭을 던지고 길긴너 슈퍼에서 맥주깡통 하나 구해다가 강변에 앉았다. 

시커먼 강위로 어둠이 피어올라 산이 된다. 

그 까만 배경위에 하얀 담배연기 같이 피워올리고... 


그렇게 짧은 지리산둘레길 여행 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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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밤은 찜질방이다. 욕조에 좀 담그고 싶기도했고. 혼자잘라니 하동 그 골방이 자꾸 생각나 우울하다. 

지리산온천 입구에 조그만 찜질방. 아쉽게 욕조는 없다. 샤워하랜다. 머 이래? 그래도 아담하고 깨끗한게. 잘만하다싶었는데...아니다. 

여기 구조가 참 특이해서. 1층 홀에서 나는 소리가 2층 다락방 취침실까지 울린다.

소근대는 소리까지 너무 잘 들린다. 그와중에 손님이랑 쥔아줌마는 자꾸 싸워대고.

잠들기전까지는 좋았는데. 잘만한데는 못된다. 지리산허브사우나.

소리의 울림으로 봐서는 공연장으로 쓰면 좋겠다.


알람을 8시에 맞췄는데. 밤새 잠 설치고 6시에 그냥 일어났다. 아침에 화엄사를 들릴 계획이었는데. 그래 좀 일찍가지뭐.

씻고나와 화엄사에 도착하니 아직 7시가 안됐다. 매표소에도 사람이 없다. 아싸.

이 시간에 절은 벌써 분주하다. 템플스테이 중인 중고딩들이 빗자루질 하느라 정신없고, 벌써 관광객도 좀 있다.

어제 행사 끝났다고 스님들은 다 나와서 연등 철거중이다. 내가 생각했던 절간의 아침 모양은 아니다.

별 감흥이 안생기고.. 휘리릭 둘러보고 철수. 사실 다리가 고장나서 휘리릭도 좀 오래 걸렸다.



첫날 밥묵었던 최강스테미너 선지내장탕에 또 들러서 아침을 먹는다. 역시 최강이다. 목화식당.

아직 한참 아침인데. 옆테이블에 아저씨 대여섯명이 앉아서 벌써 세병째 소주를 비운다. 아. 아침반주. 땡기는구나.

식사 후 자판기커피 한잔 뽑아서 가게 앞 벤치에 드러누웠는데...아쉽다.

이 커피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가 되는거다. 아쉽다.

천천히 아껴 마신다. 담배도 두대나 피고. 그것도 천천히. 



이제 더 뭉갤 건덕지가 없다. 아쉽지만 갈란다.

그리워질테니 또 오겠지.


잘있거라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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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12_부산,강릉,안산,대구 - liFe - 2013. 5. 12. 13:27
수요일. 부산행 10시 기차. 도착하니 새벽1시가 다됐다.
출출함을 편의점 라면하나로 때우고, 맥주한캔 손에들고 설렁설렁 역근처 모텔로.
이 시간에 골목에 사람이 많다. 외국인도.
찾아보니. 러시아인들이 모여사는 동네란다.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들러붙는 모양이. 그리 밝은 동네는 아닌가보다.

다음날 교육을 좀 일찍 마치고. 광안리로 향한다.
지하철에서 산책삼아 걸을한 거리였긴한데. 같이간 아줌마들이 하이힐을 신었다.
투덜투덜. 다리 아프다고. 배고프다고.
여느때처럼 건물사이로 갑자기 등장한 바다. 이게 부산 바다의 매력이다.
아줌마들은 바다는 보는둥마는둥. 찍어놓은 횟집으로 간다.

칠성횟집.
부산지사 사람들도 이집을 얘기하던데. 머 거기서 거기겠지만서도.
입은 네개. 모듬회 한사라, 광어 한사라, 매운탕에 밥 반공기, 그리고 소주 각 일병. 
배도 적당히 부르고, 취기도 살짝 오른다.
조명들어온 광안대교 배경으로 백사장을 조금 걸었다.
목을죄는 셔츠와 배를 누르는 벨트. 발을 무겁게하는 구두. 묵직한 가방까지.
광안리 올때는 머 맨날 이러냐..



시내로나와 후발대 만나. 숙소부터 잡아놓고.

그저그러 족발과 맥주안주로 재미없는 공장얘기하다보니 벌써 오늘의 시간은 끝이났다.
도요코인?? 피곤해서 잠은 잘 잤다.

다음날 오전. 부슬부슬 비가온다.
전날 모텔에 두고온 왁스를 아쉬워하며. 뭔노무 호텔에 스프레이도 없냐며..
부시시한 머리로 호텔을 나온다. 강릉을 가야하니 터미널로.
흩뿌리는 비가 어설프긴한데. 나름 운치있다.
언젠가 국화도를 찾아가던 비오던 그날처럼.
내친김에 아껴듣던 브로콜리를 귀에 꽂았다.
터미널로 가는 전철창밖으로 구름걸린 산이 음악에 흔들린다.

강릉행 고속버스는 7번국도를 타고 포항과 경주를 지나 동해안을 오른다.
이제 날은 개었고 구름은 뭉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먼 바다위를 흐른다. 깨끋해진 공기덕에 시야는 넓고 맑다.
해안선 사이사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와 마을을 보며. 언젠가 이길을 걷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강릉부터 부산까지. 어쩜 다음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6시간 걸린다는 버스는 4시간 반만에 강릉에 떨어졌다.

 오는내내 눈에 거슬리던 23사단 마크들이 앞서 터미널을 나간다. 휴가 복귀길에 바로 이 터미널에서 느꼈던 그 비참함.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감정은 선명하다. 

너희도 그렇니? 난 시내버스 타러간다. 길고 지루하지만 금방 그리워지고 서러워지더라. 잘 지내라~


준희는 그새 똘망똘망해졌다. 사람되어가는 과정은 분명 진행중인가보다. 
크기는 변한것같지 않은데.뭔가 실하고 알차진 느낌이다. 
그간 이동이 피곤했나? 이날밤 나는 눕자마자 금새 떨어졌다.

다음날 준희를 어머님께 맞기고 마눌과 안목을 나갔다. 날씨는 여전히 맑은데 바람이 좀 많다.
마눌은 오랫만에 외출이다. 분명 주중에는 어머님의 강력한 산후조리 정책에 의해 마당앞도 제대로 나가보지 못했을꺼다.
안목에도 바람이 상당하다. 햇볕은 물놀이감인데 파도가 심상치않다.
경포방향으로 맨끝 까페에 앉아 밀린 얘기를 했다. 
주중엔 어땠고, 준희는 어떻고, 건희는 어떻고, 7월 여행얘기도 하고.. 옆테이블에 바퀴벌레같은 못난커플 흉도 좀 보고.
뜨거운 물을 받아 마눌이 시킨 카모마일을 한번더 우릴까 하다가 창밖으로 화창한 날씨가 자꾸 왼쪽빰을 때리길래. 산책을 하기로 했다.
전부터 차로 해안도로를 다리며 봐둔곳이 있었다. 송정의 해송.
오늘은 차도 안가져왔고. 천천히 걷기좋다.

안목 끄트머리 간간히 가던 막국수집 부근에서 시작하는 해송길은 송정을지나 경포에서 잠깐 끊겼다가 사천을 거쳐 연곡까지 이른다.
바닷가 철조망을 따라 좁게 시작되는 해송길은 송정해변쯤에서는 넓은 군락지가 되는데.. 오늘 우리는 송정을 지나 군락지 끝까지 다녀왔다.
매번 지나칠때마다 차를 세우고싶은곳이었는데. 처가집에 와서 그렇게 한량을 부리기가 늘 쉽지 않았다.
빽빽한 솔밭 안까지 바람은 닿지 않는다. 하늘을 가린 솔잎은 그늘 밑 오솔길에 은은한 솔향을 차곡차곡 쌓아 내리고, 잘잘한 볕으로 얼룩진 그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걷다 쉬다를 반복한다.
저쪽 볕아래 숨어 마치 사냥감 보듯 우리를 지켜보던 고양이도 쫓아갔다가, 사방에 널린 솔방울을 마눌한테 투척도 해보고, 다음을 위해 돗자리 깔기 좋은 자리도 찜해놓기도 하고.



무척 기분좋은 산책을 끝내고, 산모가 너무 많이 걸었다고 투덜거리는 마누라를 택시에 실어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이제 또 가야하는구나.

준희 잘크고있고. 마눌도 몸조리 잘하고있거라... 하는데 어머님이 내손에 거대한 까만봉다리를 들려주신다.
안산 어른들 가져다 드리랜다. 머 들고다니는거 가뜩이나 싫어하는데. 거대한 짐에. 것도 꼬깃꼬깃한 까만 봉다리다.
어쨋든. 감사합니다하고. 강릉부터 마포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번 갈아타며 대중교통으로 까만봉다리 수송했다. 
내가 정장입고있지만 않았어도 좀 덜 쪽팔렸을 텐데.
어쨋든 안산 어른들은 맛있게 드셨다고 만족하셨으니. 그걸로 오케.

집에 오자마자 사흘간 숨막히던 셔츠부터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한다. 고속버스. 적당히 더워주어서 내내 진땀이 찐득했다.
이제 건희보러 가야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집을 나서 일주일 내낸 서있던 애마에 올라탔다.
앗. 근데. 조수석 창문이 열려있다. 지난번에 주차할때 열어놓고 안닫았나보다. 그간 비도 왔는데.
가지가지하는구나.
어쨌든 침입이나 도난의 흔적은 없고. 시트는 마를테고. 됐다.
안산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반이다. 바로 병원에 들러 자고있는 아들놈 얼굴한번 쓸어주고. 불쌍한 자식. 짠하네.
엄니랑 잠시 얘기좀 하다가 안산집으로 갔다.
아직 안자고있더 동생놈 꼬득여 델꼬나와 머릿고기에 소주한잔하고. 들어와 누운시간이 세시반. 잠시 핸드폰을 보고있다가 정신을 잃었다.

담날 다시 병원으로. 할머니와 복도를 산책중이던 건희가 뛰어와 안긴다.
몰랐던건데. 내새끼가 뛰어와 폭안기는 기분은. 참 특이하다.
뭔가 긍정적으로 매우 응축된 감정같은게 생기는데... 아니다. 찌질하니까 말자.

어머니 교회 보내드리고. 둘이 남았다. 왠지 불안하다.
핏자헛 한판 시켜줬더니 도우만 신나게 뜯어먹는다. 진짜 사람 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거다.
주사바늘 새로 꽂는다고 간호사들과 한참을 씨름하더니 결국 실패. 혈관 얇은것도 아빠닮아가지고.
힘이빠졌는지 한참을 자고. 오후에 두번째 씨름판을 열어서 겨우 발등에 꽂았다. 신경이 쓰이는지 걷는 모양이 절룩거린다.
그러고는 아빠랑 또봇 변신시키기를 무한반복하더니. 벌써 저녁시간.

건희야. 아빠 이제 가야되. 다섯밤자고 다시오께.
지난주에는 네밤자고온다고 했다가 건희한테 지적질 당했다. 네밤아니고 다섯밤이랜다.
말하기는 안되는놈이 듣기는 정확하다. 무슨 퇴익공부하듯이 말배우는것도 아닌데.

오늘도 다른날처럼 서운함을 표시한다.
건희가 서운을 표시하는 방법은..
첨에는 아빠엄마 못가게 하려고 분주하게 일을 마구 만든다. 책을 잔득 가져와 읽어달라 한다던지. 장난감을 좍 펼쳐놓고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본다던지. 
시간을 끄는거다. 가지말라는 거다.
그러다 안되면. 좀 시무룩해 져서 다른 놀이에 혼자 집중한다. 
이때가되면 간다고 손을 흔들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같이 손을 흔드는 경우도 있는데. 의무적이다.
이건 서운하다는거다. 잡아도 갈꺼 아는데. 그래도 서운하다는거다.

이러고 집을 나서면 매번 많이 안스럽다. 다행이 뒷끝이 길지않아 오래 우울해하지는 않는데.
그 어린놈에게 벌써 강해져야함을 가르치고있는 것 같아 민망하다.

안산을 나와 다시 텅빈 마포집으로.
라면하나 끓여먹고, 샤워하고. 주섬주섬 옷을 주서입고는 또 집을 나왔다. 낼은 대구. 오늘 가있는게 안전하다. 
어차피 집에서 같이자야할 사람도 없고.

기차에서 마신 맥주 한캔이 살짝 취기가 도는데. 이제 내려야겠다.
그냥 심심해서. 지난 5일. 정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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