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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광주교육을 마치고 바로 구례로 넘어왔다.

가고싶던 지리산인데. 근처에 왔겠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겠다, 연휴겠다.. 잘 맞아떨어진다.

그간 종용이 꼬시고있었는데. 갑자기 업무 집중모드가 되면서 시간내기 곤란하단다. 뭐. 혼자가면 되지. 

혼자서 종주코스는 좀 겁나고. 산장 예약도 안해놨고. 그래서 둘레길로 코스를 잡는다. 

구례에서 하동 대축마을까지. 이박삼일 40km쯤 되는 코스다. 토요일 오후에 떨어지겠다.


광주 업무는 수요일에 끝나는거여서 목요일은 휴가를 써야겠다 싶었는데. 울 차장님. 쿨하게 출장처리하란다. 

낼은 초파일이고 담날은 토욜이니 이번주 근무는 끝났다.

광주를 끝으로 이번 교육도 모두 마쳤고. 홀가분하게 한시간반 흥얼거리며 구례에 도착. 

저녁은 광주에서 먹고 출발했고. 여관방 하나 잡아 조금 쓸쓸함을 맥주캔으로 달래며. 푹. 잤다.


담날 아침 숙소 앞에서 최강 스테미너 음식집을 찾았다. 선지내장탕. 이런. 선지에다 내장이라니.

오늘 힘들테니...라는 생각으로 먹어둔다. 푸짐하다. 아침치고는 졸 헤비하다. 

근처 김밥천국에 들러 김밥 두줄 사고. 편의점 들러 물한통과 자유시간 네개사고. 이제 출발.

지리산둘레길 구례안내센터에서 출발한다. 

지도 한장 구하고. 설명이 친절하시다. 오늘은 어까지가서 어서자고, 내일은 또 어떻게 가다가 밥은 어서 먹고 잠은 어서자고... 구구절절 설명이 참 자세하다. 아얘 둘레길 전체 숙박 리스트를 꺼내주신다. 연락처부터 금액까지 한장에 표로 정리가 잘되어있다. 폰으로 사진 찍어가란다... 찍었다. 그리고 나중에 참 요긴하게 썼다.


이제 진짜 출발.

섬진강. 뚝방길에 올랐다. 옅은 구름이 있는데. 볕은 세다. 그래도 바람이 좀 불어주니 꽤 괜찮은 날씨다. 

강위로 새가 날고 너머에 높은 산이 벽처럼 서있다. 이런걸 찾아서 온거다. 기분 매우 좋다.

조금 가다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다리로 강을 건너고 직진하면 계속 뚝방길이다. 좀전에 본 이정표는 직진이었다. 당연히 직진한다.


수난의 시작이다.


한시간쯤 걸었는데 계속 뚝방이다. 이상한데. 

아저씨가 오미마을 가서 점심 먹으라켄는데. 점심때 되가는데 마을은 안보이고. 그러고있는데. 이상하다. 걷는길이 없어지고 이제부터는 차길이다. 

네이버지도 열어본다.

아. 쓰레빠. 아까 갈림길에서 다리 건넜어야되는거였네. 아. 쓰레빠.


온길이 아까워 돌아가지는 못하겠고. 강을 건너야 코스로 올라가는데. 다음 다리 있겠지. 일단 계속 걷는다.

오면서 계속 강건너에 신경이 간다. 저쪽에서 걷고 있어야 되는데. 뭐 그래도 방향은 같으니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걸었다. 

한산한 지방도로도 나름 매력있다. 가로수 적당히 있어주어 해도 피할만하고, 아기자기한 마을 몇개 지나가며 감탄도하고. 섬진강변 좋구나.. 이러면서.

그렇게 다음 다리를 찾아 건너는데까지 찻길로 거의 10km.


어쨋든 건넜다. 방향도 코스방향과 같으니 둘레길로 올라가기만하면 된다. 

점심먹으라고했던 오미마을은 강건너에서 진작에 지나왔다. 점심이야 김밥두줄 있으니 것도 괜찮다. 

바로 앞에 슈퍼가 있길래 들어갔다. 할머니 식사하고계신다. 넙죽 인사하고 물한통, 설래임하나 집었다. 

땡볕에 거의 두시간반을 걸으면서 물은 바닥나고 입이 바짝바짝 타고있어던거다. 

할머니. 여기서 둘레길 올라갈라면 얼로가요?

할머니는 표정도 없고 대답도 없다. 둘레길이 머냐는 표정이다. 그냥 또 넙죽 인사하고나와서 바로옆 버스 정류장에 앉아 설레임 흡입에 들어갔다.

달달한 수분이 타는 모가지로 넘어간다. 아. 맛있다. 이게 이렇게 맛있었나.. 앞으로 아이스크림은 설레임만 먹을것같다.

손으로 꾹꾹눌러 녹여가면서 그야말로 흡입했다. 오분도 안걸린거같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다시며. 옆에있는 식당에 들어간다. 사실 상가라고는 그 두개 밖에 안보인다. 

여기서 둘레길로 올라갈라면 얼로가요?

테이블 닦던 아줌마가 나온다. 아줌마 같긴한데. 나보다는 좀 어려보이고. 알바인가? 

어쨋든. 여기서는 올라가는길 없고 거꾸로 좀 가야한단다. 썅. 거꾸로라니.

또 넙죽 인사하고. 가게 앞에서 네이버지도와 안내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같이 펼쳐 길을 찾는다. 거꾸로 30분 정도는 가야할 것 같다... 걷지뭐. 쩝.

다시 찻길을 따라 오분정도 터벅터벅 걷는데. 바로 앞에 차가 한대 서더니 날 부른다. 좀전에 본 식당 아줌마다. 

구례에 볼일있어 가는길인데 태워주겠단다. 아...감사합니다. 하고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를땐 정말 감사했다. 정말로. 자동차의 속도감에 새삼 감탄하며.


근데 좀 많이간다. 이쯤 서야되는 것 같은데. 계속간다. 이 아줌마 날 앉혀놓고 수다떠느라고 말할 틈도 안준다.

그렇게 한참 가더니 어느 마을 앞에 세워준다. 저 마을로 들어가면 둘레길 보인댄다. 아... 근데 너무 왔잖아.

그래도 그 친절함에 완전 감사모드로 깊은 인사드리고 차를 내렸다.

마을로 들어갔더니 둘레길 이정표가 보이긴 한다. 출발한지 세시간만에 이제서야 코스로 올라온거다. 출발점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오미마을까지 다시 한시간 정도 갔다. 

마을 넘어가면서 또 쑈를 한다. 표지판 따라가다가 산으로 들어갔는데 길이 또 끊긴거다.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다싶어서.. 그냥 넘어간다. 길도 없는 산. 

내가 가는 곳이 길이라는 생각으로 어찌어찌 넘어간다.

그렇게 오미마을에 도착한거다. 길도없는 산 넘어오느라고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시간은 벌써 세시. 송정마을까지 가야하는데 갈길은 아직 10km 정도 남았다.

사실 정상적으로 왔으면 송정 도착해서 기촌까지 8km 정도 더 걸을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삽질하느라 체력을 많이 날렸다. 송정까지만 가자.


산넘어오면서 또 물이 거덜났다. 오미에서 슈퍼부터 찾는다. 이번에는 물 두통, 캔디바 하나. 

슈퍼앞 평상에 늘어져서 또 캔디바 흡입한다. 

오늘의 굳은 결심을 번복한다. 앞으로 아이스크림은 캔디바와 설레임만 먹을 것같다.

그런데 슈퍼 앞 풍경이 심상치 않다. 먼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강을지나 너른 들판을 넘어 내 얼굴을 때린다. 

여기 주인아줌마는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서 가게문을 열겠구나.. 부러운거다.



그러고보니. 아. 맞다 숙소. 안내센터에서 찍어왔던 숙박업소 리스트를 열어 맨위의 게스트하우스에 전화한다. 

기촌마을 쪽 숙소라 내가 도착할 송정에서 거리는 좀 되는데... 픽업 한댄다. 도미토리방 침대하나 빌렸다.

잘 쉬었다. 이제 또 걷자. 


이제 마을 길을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시멘트 포장된 오솔길이다. 

그길을 따라 재를 두세개 넘어간다. 완만한 길은 좀 빨리, 가파른 길은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며 체력을 아낀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사람은 한마리도 없다. 하루종일 둘레길 반대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 딱 세명 만났다. 같이 걷고있는 아줌마들이다.

노래도 흥얼거리고 혼잣말도 중얼거리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걷는다. 

푸르름이 지나쳐 녹음이되어가는 숲길에 들리는 거라고는 바람에 쓸리는 나무와 새소리. 그리고 내 발자국소리 뿐이다. 

이 조용한 소리들이 아까워 이어폰따위는 진작에 배낭에 넣어버렸다.

어느 재를 넘어가며 꼭데기에 앉아 신발끈을 풀었다. 

눈아래 섬진강이 굽고 굽으며 산 사이로 흘러간다. 사진도 찍고. 자유시간 하나 까먹고. 하얀 담배연기도 좀 뿌려주고.

잠시 친구들과 카톡을 날리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다섯시반. 가야할 길은 4km. 이제 좀 서둘러야겠다. 

지금 페이스라면 한시간반? 도착할 시간을 대충 어림짐작하며. 좀 타이트 한데.. 낮이 많이 길어졌으니 괜찮겠지.



그런데 이제부터 산길이다. 오르막이 가파르다. 걸음이 느려진다. 

벌써 20km 이상을 걸어와 다리가 많이 풀렸고, 무릎에서 열도 나는 것 같다. 옷은 땀으로 젖었는데.. 물통은 비어간다.

그러다 중간에 계곡을 하나 만났다. 이게 오아시스 만나는 기분인가보다. 가방 패대기치고 머리부터 담근다.

땀으로 젖었던 머리를 얼음장 같은 계곡물로 적신다. 등목같은 세수를 하고.


시간이 없다. 계속 가자.

근데 속도는 점점 더뎌지고, 숨은 넘어갈 것 같고, 쉬는 간격은 점점 짧아지는데.. 해는 넘어간다. 난감하다.

중간 어디쯤 또 앉아 남아있던 김밥으로 힘을 내본다. 하지만 뭐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간다고 풀린 다리가 회복되는것도 아니고. 힘든건 매한가지다. 

이제는 물도 떨어졌고. 아직 어둡지는 않지만 해는 벌써 넘어갔다. 산은 끝날 생각을 안하고.

아까부터 후회되는게 하나있다. 카메라. 바디에 렌즈 두개. 이것때매 배낭이 묵직하다. 렌즈 하나는 망원이라 더 무겁다. 

아. 쓰레빠. 핸폰카메라도 좋은데. 망원이라도 놓고올껄.


이쯤되니 지리산 곰 얘기도 생각난다. 멧돼지도. 오는길에 사람 똥 굵기 만한 똥을 몇번 봤는데. 들짐승이 있긴한가보다. 

주변에서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신경쓰이고. 낮에 그렇게 정겹던 새소리도 이제 열라 음산하다.

게다가 확신하건데. 이 산에 사람이라고 할만한건 나 혼자다. 벌써 대여섯시간째 사람구경을 못했다. 자꾸 섬짓한거다.

죽을동 살동 걷는다. 지팡이하나를 두손으로 쥐고 가파른 산을 기는 자세로 오른다. 마음은 급한데 여전히 속도는 나지 않는다.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고 한참 지나서. 자동차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그리고는 도로가 나왔다. 

송정마을이다. 시간은 7시반. 내가 산에서 나오길 기다렸다는듯이 마을은 금새 어두워졌다.


산에서 물이 떨어지고나서부터 막걸리가 생각났다. 쓰원한 막걸리. 갈증이 탔는데 막걸리 생각하면서 벼텼다. 

마을에 내려오자마자 밥집부터 찾았다. 그런데 밥집은 고사하고 집이 몇채 없다. 여기도 조그만 산중 마을이라 상가라는게 없나보다.

숙소에 전화해서 여기까지 픽업오라고 하면되긴한데. 들어갔다 나오면 막걸리 간절한 이 갈증이 없어질 것 같다. 

강변 큰길로 내려가면 식당 한둘은 있겠지.. 느릿느릿 도로 따라서 또 삼십분 걸어내려온다.

큰길가에 식당이 세개. 다 문 닫았다. 좌절. 하는 수 없다. 숙소에 전화해 아줌마 불렀다. 

강가 평상에 뒤집어져 담배한대 피는 사이에 차가 도착했고. 차로 10분 정도 달려 숙소 도착.

"숨게스트하우스". 이름 특이하네. 살짝 언덕 위에 강을 내려보고있는 건물이다. 

픽업나온 아줌마가 낮에 통화했던 사장님인데. 늦게까지 전화 없길래 다른집 간 줄 알았댄다. 

숙소에 도착해서. 물한모금 안마시고. 가방만 던져놓고는 바로 나왔다. 



사장님. 여기 밥집 어딧어요? 왔던길로 10분정도 걸어가랜다. 또 터덜터덜 걸었다.

기촌마을. 입구에 불이 번쩍거리는 집이 좀 있는데 자세히보니 다 펜션이다. 

이제 겨우 8시인데 식당은 다 문 닫았고 달랑 횟집하나 찾았다. 들어갔더니 중딩스러운 꼬맹이 하나가 나온다. 왠지 영업할 분위기 아니다.

식사 되요? 어른들 어디 가셨는데 언제올지 모른단다. 뭐지 이거? 나와서 다시보니 역시 간판엔 불은 켜있다. 뭐지 이거? 

마을 다시 둘러봤는데 밥집 없다. 괴롭다. 차로 10분정도 가면 화개란다. 장터가면 식당있댄다. 

더는 걸을 수 없어서 택시찬스를 쓰기로 했다. 근데 택시는 고사하고 다니는 차가 많지않다. 진짜 괴롭다. 

그와중에 동네 청년하나가 길넘어에서 나타나 도로로 들어오더니 중앙분리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내옆에와서 줄넘기를 한다. 

핸드폰 음악소리에 맞춰 줄을 넘는거다. 아.. 진짜. 뭐지 이거?

난 옆에 멀뚱히 서서 줄넘는거 보다가 차오는쪽으로 보다가. 그렇게 또 10분 정도. 난감하다.

잘못하면 슈퍼에서 라면사다가 숙소에서 끓여먹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식당 열어두고 어디간 어른들이 돌아오지 않았을까싶어서 길을 건너 중딩을 다시 찾아간다. 

어른들 안왔어요? 그럼 전화해서 영업하실껀지 함 물어봐 줄래요? 이녀석 쭈삣거리더니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금새 아줌마가 나타났다. 

밥 좀 주세요. 여기 횟집이라 식사라고 할만한게 없댄다.

흘깃 냉장고를 봤는데. 막걸리다. 이쯤되면 완전 비굴모드다. 암꺼라도 괜찮으니까 밥좀 주세요ㅠㅠ.

먹을라고 끓여놓은 된장국있는데 괜찮냔다. 오우... 졸라 땡큐. 


그렇게 기나긴 시련과 기다림 끝에 시원한 막걸리는 나에게 수줍게 다가왔다. 

사발에 찰랑 거리도록 한잔 가득따라. 완샷. 

과장없이 정확하게 말하건데... 내인생 최고의 한잔이다.

널위해 난 36년을 살아, 오늘 25km를 걸었고, 4시간 동안 수분섭취를 참았던거다.


진심으로. 고마운. 맛이다.


둘째잔은 투샷. 셋째잔은 쓰리샷. 막걸리 한병의 정확한 용량은 국사발로 3잔이라는 새로운 깨달음도 주시는구나. 

아쉽긴했는데 더 마시면 이 신성한 감동이 줄어들 것 같아 술은 그만. 저녁마다 마시던 맥주캔도 이날은 먹지 않았다. 

식사는 천천히 오래했다. 먹던 된장국이 미안한지 계란후라이 두개도 반찬으로 올라왔다. 어쨌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땀내나는 옷 벗고, 샤워하고, 주방에서 커피한잔 타다가 건물앞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 

여기도 외진 동네라. 어둠이 깊다. 바로 앞이 섬진강일텐데 희미하게 산 능선만 보인다.

또 기분좋은 바람이 분다. 뭉친다리를 펼쳐 셀프마사지. 마눌과 전화한통. 건희와 전화한통. 

커피도 맛있고 바람도 맛있다.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는 매우 기분좋은 밤이다.


다음날 아침. 눈뜨니 8시. 좀 일찍 일어나 물안개 내린 섬진강의 비경을 보자 했는데. 역시 무리다.

방은 이층침대 세개 놓인 6인실이었는데. 나 혼자 잤으니 독방인셈이다. 그래서 편하게 잤다. 시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커피랑 토스트 구워다가 로비의 넓은 마루에 앉아 지도를 보며 오늘 경로를 연구하고 있는데 사장 아줌마가 오셨다.

여행객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게스트하우스 주인답게 털털하고 입담도 좋다. 훈훈함도 있고. 

사람과 대화하는게 삼일만이라 그런지 반갑다. 잠깐 수다 좀 떤다.


숙소에서 하동쪽으로 도로따라 20분정도 걸으니. 화개장터. 토스트로 버텨야할 오늘이 걱정되어. 밥을 먹기로했다.

장터는 작고 보잘것 없다. 휘리릭 둘러보고. 딱봐도 여행객들이나 들를만한 식당 몇개중에 하나를 찾아들어간다. 

제첩국이요.

시원하고, 맛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스테미너가 필요한데. 소머리국밥을 먹을걸.



오늘은 원부춘에서 대축마을까지 9km만 걸을란다. 송정에서 원부춘까지 하루 코스 정도를 생략하는거다.

지금 다리 꼬라지 봐서는 오늘 일정도 끝까지 갈랑가 모르겠다.

어제의 삽질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이동경로를 꼼꼼히 봐둔다.

처음 2km정도 산을 오르면 그뒤로는 완만하게 내려오는 길이다. 코스가 좀 만만해 보인다.

화개장터에서 원부춘까지 버스가 있는데. 하루 한대란다. 앞으로 네시간반 남았다. 

이번엔 진짜 택시찬스다. 강변도로를 달려 산길을 한참 올라가더니 마을회관앞에 선다. 

얼마요? 팔천원. 더럽게 비싸네. 오지 프리미엄인가보다. 말은 못하고 그냥 또 넙죽 인사하고 내렸다.


마을회관앞에 익숙한 이정표가 보인다. 대축마을 8.7km. 오늘 목적지다. 이정표따라 또 걷는다.

한산한 산골마을 지나자 바로 산길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 이 산에는 인기척이 좀 있을라나. 

결론적으로. 어제보다는 좀 나았다. 그래도 여섯시간동안 한 열명정도는 만났으니까네. 

다리가 열라 쑤셨는데. 걸어보니 또 걸을만하다. 오늘은 천천히 주변 좀 보며 쉬엄쉬엄 다녀야겠다. 

지금 오전 11시니까. 아무리 퍼지더라도 또 산에서 해지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가파른 길은 힘있을 때 부지런히 걸어놔야겠다싶어 열심히 올라간다.


지도를 보니 가는 길에 절이 하나 있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초파일이고. 잘하면 절밥 한그릇 얻어먹을수도 있겠다...싶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절이 아니다. 

벽에 동자승 그림만 지우면 그냥 가정집니다. 여기 스님은 큰절 행사에 지원나갔나? 사람소리하나 안들린다. 괜히 입맛다시며 지나간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에 근사한 선녀탕이 여러개 등장한다. 사람도 없는데 옷벗고 좀 담그다갈까...하다가 그냥 패스.

움막도 하나 만났다. 나무 설기설기 붙여서 지은 집인데. 창고인가? 한시간정도 걸어올라왔으니 마을에서는 한참 떨어진곳 인데.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있다. 먼지 잔뜩낀 오래된 이불도 있고. 나름 조그만 방도 있고, 거실도 있다.

누가 여기서 왜 살다가 왜 나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외진곳에서 저 계곡을 내려다보며 혼자 참 외로웠겠다.

잘 내려가셨소.



그렇게 산꼭데기까지 두시간정도.

꼭데기를 넘어 내려오던 길이 넓은 바위를 지나간다. 바위끝을 보니 절벽이고. 그 아래로 넓은 평원을 너머 섬진강이 또 구비구비 흐른다.

절벽구석에 조그만 나무그늘. 한명 드러눕기 딱 좋아보인다. 날 위한 자리다. 아얘 양말까지 벗고 배낭비고 누웠다. 

근처에 활공장이 있다더니 멀리 머리위로 사람 대롱대롱 달린 글라이더 몇마리가 날아다닌다. 이 절경을 보며 태워대는 담배맛이 끝내준다.

 내친김에 마눌한테 탱고날려서 자랑질도 하고. 

그렇게 한참 늘어지게 쉬고나서는 이제 또 출발.




이제 계속 내리막인데 다리가 풀린다.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서 산아래 마을까지 내려왔다.

입석마을. 안그래도 어제부터 매실나무를 많이 보기는 했는데 이 마을에도 매실과수원이 널렸다. 

자식같이 소중하게 키운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붙었다. 그래도 괜찮아보이는 놈으로 하나 따서 물어본다. 낙과라고 생각하소. 시큼한데 향긋하다. 마른입에 침이 돈다.

여기는 그간 지나왔던 마을보다 그나마 집이 좀 많다.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양이 딱 조촐한 시골마을이다.

또 설레임이 생각나길래 지나가던 아저씨한테 슈퍼를 물었더니 그런거 없댄다. 아쉽다. 마을을 나오니 입구에 그럴싸한 주막도 하나있다.



둘레길은 마을을 벗어나 개울 뚝방을 타고 넓은 들판을 가로지른다.

저 위에서 봤던 그 평원이다. 이정표는 이제 2km정도 남았다고하는데 왼쪽다리가 잘 안움직인다. 그래도 뭐 평지 고작 2km니까.

절룩거리며 땡볕이 내리쬐는 뚝방을 걷는다.

발바닥도 한쪽구석이 자꾸 아픈게 이상하다. 나중에 보니까 물집이다. 양발에 하나씩. 군대 행군 이후로 발바닥 물집은 첨이다.

들판은 온통 사람키만한 보리밭이다. 어떤 밭은 아직 파릇파릇하고, 어떤 밭은 벌써 누렇게 익었다.

그렇게 보리구경하며 한참 걷다가 뒤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길이 보인다.

저기 저위에 능선을 넘어서 이제는 점같은 저 절벽에 누웠다가 산밑 저 작은 마을을 지나 여기까지 왔구나.

그뒤로는 한참 더 높은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산은 푸르고, 하늘은 더 푸르고, 양털구름은 사선으로 패턴을 그리며 그 위에 대충 걸렸다.

무의식적으로 혼자걷는 다리와 볕에 익어 따끔거리는 모가지, 나꾸 잡아 끌어내리는 배낭의 무게감 까지. 

이 모든걸 보고 느끼며 알았다. 


아... 그리워질게 또 하나 생겼구나.


그렇게 걸어 대축마을에 도착했다. 

그간 따라오던 이정표는 이제 다음 마을을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바뀌었다. 무심한놈. 애썼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시간은 네시반. 그러고보니 깜빡하고있던게 생각났다. 오늘 어디서 자지? 

마을입구에 민박 전화번호가 하나 보이길래 걸어봤더니 안한댄다. 더 찾아봐야하나?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목이나 좀 축이자.

마을 안쪽에 슈퍼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가 문 안쪽에 앉았다가 내가 들어가니 멀뚱하게 보신다. 설래임 하나 집어들고 계산하는데 버스 시간표가 보인다. 

여기서 타면 하동시내 가요? 30분에 한대씩 버스가 있는데 5시, 그 다음껀 5시반. 

생각해보니 여기서 숙소잡기 쉽지 않겠다. 연휴 첫날이라 어지간한데는 다 차있을것 같기도하고. 게다가 혼자잘껀데 민박이건 펜션이건 금전압박도 좀 있고. 

시내나가는 버스표를 한장 끊었다. 15분정도 걸린댄다.


슈퍼옆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비스듬히 걸터앉아 또 설래임 흡입한다. 또 졸라 맛있다. 

그간의 고통이 온전히 내꺼였으니까 이런 기쁨도 온전히 내꺼인가보다. 

양말을 벗어 발도 좀 쉬어준다. 

슈퍼 할배는 지나가던 마을사람이랑 뭔 얘기를 주고받더니 가게 문 잠그고 나가버린다. 좀 늦었으면 이 설레임 못먹을 뻔했다.

정자기둥에 등을 기대고 바람을 즐겼다. 

이 기분이 아쉬워 버스 한대 보내고 삼십분을 더 얻었다.

그러고도 떠날라니 아쉽지만. 이제 하동으로.


하동 시내는 어설프다. 도시처럼 정돈되어있지도않고, 그렇다고 너저분함이 푸근한 읍내 분위기도 아니다. 

이것저것들이 그냥 마구 놓여있다. 서울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간판들이 천박스럽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난감해졌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다리는 잘 움직이지 않는데 어디 앉아 쉴만한데도 없다. 

좀전까지만해도 아무데서나 신발 벗으면. 강바람 불어오는 산배경의 근사한 휴식처였는데. 

갑자기 매우 우울해졌다. 울컥할정도로.

터미널 옆 오래된 콩국수집에서 국수한그릇 비우고 창밖을 보고 앉았는데. 울컥함이 가시지않는다. 


클라이막스는 끝난거야. 

대축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빨던 설레임이나 정자아래 불어주던 바람이 끝이었던거야. 

그리고는 갑자기 끝난 클라이막스처럼. 기분도 갑자기 추락했다. 

여길 오는게 아니었는데.. 제길. 어떻게든 방을 구해 대축마을에 남아있어야했는데.


배낭때문에 발이 더 무거웠다. 어디든 짐을 내려야했다. 

눈에 보이는 여관에 들러 방을 잡았는데. 천정에 거의 닿은 조그만 창문하나 달린 골방이다. 멈칫했는데. 우선 계산을 하고 짐만 놓고 바로 나왔다. 

느릿느릿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어디에도 있을만한 데가 없다. 시간은 7시도 안됐는데 그 골방에 들어갈수도 없다. 

그러다 뜨레주르가 보이길래 들어가 냉커피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았다.


뜨레주르에서도 또 이 글을 쓰고있었다. 사실 여행중에 심심해질때마다 이걸 계속 써왔었다.

혼자일수록 잘 기록해놓지 않으면 이 경험들 부실한 기억과 함께 금방 날라가 버릴꺼다.

커피 홀짝거리며 핸드폰 자판을 두들기고있었는데... 갑자기 구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밤 이곳에서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확신인거다. 

하동터미널에 내리면서 사진 찍어뒀던 시간표를 보니 7시반에 차가있다. 10분 남았다.

바로 여관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나와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앉았는데. 갑자기 참았던 울컥함이 터진다.

아.. 쪽팔려. 머지 이거? 뭐가 왜 터진거지? 

생각해보니 혼자다녀서 그런가보다. 강도있는 감상들이 공유되어 풀어지지 못하고 쌓였다가 터지나보다. 어쨌든. 찌질하다.

뭐. 터진건 터진대로 놔뒀다. 통로 너머 옆자리에 외국인 둘이 앚았는데. 보일까봐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해떨어지는 섬진강변을 달리는 차안에서 소리없는 눈물이 한참 흘렀다.


얼굴을 추스리고 어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도 해본다. 

아줌마가 오늘 예약 만땅이라고했었는데 혹시나 취소된 도미토리라도 하나 없을까 싶었다. 

역시. 없다.


그간 주구장창 걸어갔던 그길을 버스는 40분만에 주파했다. 

밖으로 이젠 익숙해진 풍경들이 지나간다. 강은 항상 오른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왼쪽편에서 흐른다.

구례 터미널에 내려 느릿느릿 걸어 내차를 세워둔 강변에 도착. 

강바람이 분다. 그래 하동시내에는 이것도 없었어. 강바람.


차에 배낭을 던지고 길긴너 슈퍼에서 맥주깡통 하나 구해다가 강변에 앉았다. 

시커먼 강위로 어둠이 피어올라 산이 된다. 

그 까만 배경위에 하얀 담배연기 같이 피워올리고... 


그렇게 짧은 지리산둘레길 여행 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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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밤은 찜질방이다. 욕조에 좀 담그고 싶기도했고. 혼자잘라니 하동 그 골방이 자꾸 생각나 우울하다. 

지리산온천 입구에 조그만 찜질방. 아쉽게 욕조는 없다. 샤워하랜다. 머 이래? 그래도 아담하고 깨끗한게. 잘만하다싶었는데...아니다. 

여기 구조가 참 특이해서. 1층 홀에서 나는 소리가 2층 다락방 취침실까지 울린다.

소근대는 소리까지 너무 잘 들린다. 그와중에 손님이랑 쥔아줌마는 자꾸 싸워대고.

잠들기전까지는 좋았는데. 잘만한데는 못된다. 지리산허브사우나.

소리의 울림으로 봐서는 공연장으로 쓰면 좋겠다.


알람을 8시에 맞췄는데. 밤새 잠 설치고 6시에 그냥 일어났다. 아침에 화엄사를 들릴 계획이었는데. 그래 좀 일찍가지뭐.

씻고나와 화엄사에 도착하니 아직 7시가 안됐다. 매표소에도 사람이 없다. 아싸.

이 시간에 절은 벌써 분주하다. 템플스테이 중인 중고딩들이 빗자루질 하느라 정신없고, 벌써 관광객도 좀 있다.

어제 행사 끝났다고 스님들은 다 나와서 연등 철거중이다. 내가 생각했던 절간의 아침 모양은 아니다.

별 감흥이 안생기고.. 휘리릭 둘러보고 철수. 사실 다리가 고장나서 휘리릭도 좀 오래 걸렸다.



첫날 밥묵었던 최강스테미너 선지내장탕에 또 들러서 아침을 먹는다. 역시 최강이다. 목화식당.

아직 한참 아침인데. 옆테이블에 아저씨 대여섯명이 앉아서 벌써 세병째 소주를 비운다. 아. 아침반주. 땡기는구나.

식사 후 자판기커피 한잔 뽑아서 가게 앞 벤치에 드러누웠는데...아쉽다.

이 커피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가 되는거다. 아쉽다.

천천히 아껴 마신다. 담배도 두대나 피고. 그것도 천천히. 



이제 더 뭉갤 건덕지가 없다. 아쉽지만 갈란다.

그리워질테니 또 오겠지.


잘있거라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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